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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교양/역사118

르네상스 운동과 인문주의 사조의 대두로 본 문예부흥기 중세 시대를 지나 근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르네상스 시대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문화적 부흥기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약 300년간 지속된 이 시기는 예술, 문학, 과학 등 다방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냈죠. 특히 인문주의 사조의 발흥이 르네상스 운동의 핵심 동력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먼저 중세 시대의 권위주의적이고 신학 중심적인 세계관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새로운 사고와 가치관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스와 이탈리아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전파되기도 했죠. 이런 분위기 .. 2024. 5. 18.
오스만 튀르크의 비잔틴 제국 정복과 이스탄불의 함락 오스만 튀르크의 비잔틴 제국 정복과 이스탄불의 함락친구 여러분, 오늘은 중세 유럽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 즉 오스만 튀르크의 비잔틴 제국 정복과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함락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비잔틴 제국의 몰락과 오스만 제국의 급부상을 알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죠. 비잔틴 제국의 쇠락과 오스만 튀르크의 부상비잔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후신으로,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7세기부터 시작된 아랍 세력의 팽창, 십자군 전쟁, 라틴 제국의 침략 등으로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죠. 13세기 중반에는 오스만 튀르크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오스만 튀르크는 13세기 초 현대 터키 지역에서 시작.. 2024. 5. 18.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에스파냐·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 1콜럼버스의 대항해와 신대륙 발견1492년 8월 3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라 1세의 후원을 받아 신항로 개척을 위해 대항해에 나섰습니다. 콜럼버스는 니냐호, 피타호, 산타마리아호 등 3척의 배를 이끌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같은 해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했습니다.콜럼버스는 당초 서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가 발견한 곳은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신대륙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이 아시아의 동쪽 끝이라 생각하고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습니다. 콜럼버스는 이후 1493년부터 1504년까지 3차례에 걸쳐 항해를 계속했고, 카리브해 연안과 중앙아메리카 등 신대륙 각지를 탐험했습니다.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무역로를 제공.. 2024. 5. 18.
몽골 제국의 창건자 징기스 칸과 대륙 정복의 과정 1징기스 칸의 배경과 몽골 부족 통일12세기 후반, 칭기즈(징기스 칸의 본명 템우진)는 현재 몽골 북부 헨티 산맥 일대에서 목축업을 영위하는 평범한 몽골 부족 출신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몽골 고원 일대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며 극심한 분쟁을 벌이고 있었죠. 템우진의 어린 시절 또한 이런 부족 간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어린 템우진은 부족 간 복수전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게 됩니다. 이후 모친 오엘룬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결국 타 부족에 의해 납치되어 수년간 포로 생활을 했죠. 하지만 이런 극심한 역경 속에서도 그는 비범한 지략과 리더십을 발휘해 나갔습니다. 1189년, 16세의 나이로 감금에서 벗어난 템우진은 오랜 동료 보르추와 함께 군대를 모으기 .. 2024. 5. 18.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대항해시대의 개막 1마르코 폴로 가문의 배경과 동방 무역길 개척마르코 폴로는 당시 이탈리아 최대의 무역 도시 베네치아 출신 부유한 상인 가문의 자제였습니다. 그의 외할아버지 안드레아 폴로와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이미 1260년대 초반부터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원정을 떠나며 동방 무역로를 개척한 선구자들이었습니다. 1271년, 마르코 폴로는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두 번째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당시 팔레스타인과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등을 거쳐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 있던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게 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그들을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폴로 가는 쿠빌라이 칸에게 호의를 받아 17년 동안 제국을 활보하며 귀중한 경.. 2024. 5. 18.
백년전쟁에서 드러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세력 다툼 1백년전쟁에서 드러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세력 다툼중세 후기 유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단연 백년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16년 동안 지속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치열한 대결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두 강대국 간 권력 균형이 크게 흔들렸고, 유럽의 지정학적 구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백년전쟁의 배경백년전쟁의 근본 원인은 두 나라 간 왕위 계승권 다툼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위는 1328년 직계 혈통이 끊기자 사실상 왕위 계승자가 없어졌습니다. 이에 에드워드 3세 잉글랜드 왕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영토 확장과 자국 우위 확보 등으로 그 양상이 변화했습니다. 양측은 막대한 자금과 병력을 투입하며 치열한.. 2024. 5. 18.
당나라 때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통한 활발한 문화교류 1실크로드, 동서양을 잇는 교역로의 탄생실크로드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낙타 카라반이 가로지르는 모습? 아니면 이국적인 물건들이 가득한 도시의 시장 풍경일까요?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역로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답니다. 그것은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문화 교류의 통로이자, 인류 문명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어요. 특히 중국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실크로드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죠. 당나라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동서 교역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비단은 물론이고 도자기, 양탄자, 보석 등 다양한 상품들이 대량으로 오가며 경제적 부를 창출했어요. 당나라의 수도 장안(現 시안)은 국제적인 대도시로 성장하기도 했죠. 그런데 교역로를 통해 문화적 교류.. 2024. 5. 18.
게르만 부족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한 프랑크 왕국 1 중세 초기 유럽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할거하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 가운데 라인강 하류 지역을 근거지로 한 프랑크족이 5세기경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점차 갈리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다른 게르만 부족들을 제압하고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습니다. 특히 6세기 중반 즉위한 클로비스 1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의 지지를 얻어 프랑크 왕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 메로빙거 왕실은 내분과 기득권 다툼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대신 궁재(宮宰)라 불리는 실력자들이 국정을 좌우하게 되었지요. 8세기 초, 카롤루스 마르텔이라는 궁재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프랑크 왕국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베리아반도를.. 2024. 5. 18.
노르만 인들의 정복 활동과 영국 윌리엄 공화국의 탄생 1노르만 족의 기원과 특징노르만 족은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 사이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이주해온 북유럽 민족으로, '북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의 '노르드만(Northman)'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들은 바이킹의 후예로서 뛰어난 항해술과 전투력을 바탕으로 유럽 각지로 원정을 떠났는데, 특히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와 맺은 생 클레르 조약을 계기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서게 됩니다. 노르만 족은 다른 바이킹들과 달리 정착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동화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노르망디에 정착한 후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의 봉건제와 기사도 문화를 수용하면서 독특한 노르만-프랑스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처럼 유.. 2024. 5. 18.
몽골 제국의 창건자 징기스 칸과 대륙 정복의 과정 징기스 칸의 배경과 몽골 부족 통일12세기 후반, 칭기즈(징기스 칸의 본명 템우진)는 현재 몽골 북부 헨티 산맥 일대에서 목축업을 영위하는 평범한 몽골 부족 출신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몽골 고원 일대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며 극심한 분쟁을 벌이고 있었죠. 템우진의 어린 시절 또한 이런 부족 간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어린 템우진은 부족 간 복수전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게 됩니다. 이후 모친 오엘룬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결국 타 부족에 의해 납치되어 수년간 포로 생활을 했죠. 하지만 이런 극심한 역경 속에서도 그는 비범한 지략과 리더십을 발휘해 나갔습니다. 1189년, 16세의 나이로 감금에서 벗어난 템우진은 오랜 동료 보르추와 함께 군대를 모으기 시.. 2024. 5. 18.
십자군 원정과 이슬람 세력과의 대결로 본 중세 기독교 세계 1이념 대결의 서막, 중세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력의 충돌중세 시대, 유럽의 기독교 세계와 중동의 이슬람 세력 사이에는 격렬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군 원정입니다.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전개한 일련의 대규모 종교 전쟁을 일컫습니다. 최초의 십자군 원정 발원지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열렬한 연설을 통해 성지 탈환을 위한 원정에 나설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촉구했죠. 그의 호소에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기사들과 농민들이 동원되었습니다. 1096년 8월, 제1차 십자군 원정군은 비잔틴 제국과 협력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했습니다. 니케아, 에데사, 안티오키아 .. 2024. 5. 18.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만든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 1안녕하세요, 역사 애호가 여러분! 저는 오늘 6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의 이름은 들어보셨겠지만, 과연 그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잘 모르실 텐데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봅시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527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여러 가지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내부적으로는 종교와 정치의 갈등, 경제 침체, 귀족들의 세력 확대 등의 문제가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페르시아, 슬라브족, 아바르 인 등 주변 세력들의 잦은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런 혼란 속에서도 뛰어난 통치 능력과 야심찬 정책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새로운 황금기로 이끌어갈.. 2024. 5. 18.
16세기 유럽의 격변: 허닝밸리 전투와 아틸라의 기마민족 최대 전성기 116세기 초반은 유럽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서유럽의 여러 강대국들이 부상하고 세력 균형이 크게 변화했는데, 특히 451년에 일어났던 허닝밸리 전투는 이 지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허닝밸리 전투: 로마 제국과 기마민족의 대결허닝밸리 전투는 5세기 중반 로마 제국과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혹은 흉노) 사이에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로마 제국은 점점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강력한 기마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서유럽 전역을 약탈하며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451년 6월, 아틸라의 막강한 기마군이 프랑스 북동부 지역인 허닝밸리로 진군해왔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서로마 제국.. 2024. 5. 17.
예수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탄생 1기독교는 1세기 초 유대인 예수에 의해 창시된 새로운 종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지배되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는, 자신이 구약성서에 예언된 메시아(구세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의 구원자라고 주장하며,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민중들에게 큰 희망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 유대교의 전통에 기반했지만, 그 해석과 중점사항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과 용서, 평화를 강조했고, 부자와 권력자들이 아닌 가난한 자와 소외계층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또한 기존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제사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여, 영적 각성과 내면의 신앙심을 강조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했고, 많은 이적과 .. 2024. 5. 17.
로마제국의 전성기, 팍스 로마나의 찬란한 개막 1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제국의 개창자가 된 27년 전부터,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로마의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정복 정책은 현명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적극적인 영토 확장보다는 기존 영토의 안정과 통치력 확립에 주력했죠. 현실적인 국경선을 설정하고 국력을 제국 내부에 집중함으로써 평화로운 시기를 열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아우구스투스는 대대적인 행정 개혁에 착수합니다. 그는 관료제 체계를 전면 재정비하고 엄격한 계급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관리와 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죠. 세금제도와 화폐 통용권 또한 전국 단일 규격으로 일원화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지방마다 각기 다른 세금과 화폐가 통용되어 무질서했지만, 이제 중앙 집권적 체계가 갖춰진 것.. 2024. 5. 17.
포에니 전쟁의 배경 1기원전 3세기경, 지중해 세계를 둘러싼 패권 다툼이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점점 고조되었습니다. 양측 모두 지중해 무역로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죠.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는 이미 그리스 세계와 동부 지중해를 장악한 반면,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스페인,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서부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번영을 구가하던 두 해상 강국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게 되었죠.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 섬이 그 촉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는데, 마메르티누스 용병단이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로마는 이를 계기로 개입했고, 이는 카르타고와 전면전으로 이어졌죠. 이렇게 시작된 포에니 전쟁은 무려 23년에 걸쳐 이어졌고, 총 3차례의.. 2024. 5. 17.
마케도니아의 왕자에서 세계정복자로 떠오른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4세기, 그리스 북방의 작은 왕국 마케도니아에서 한 젊은 왕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입니다. 그는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뒤, 약 10년간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전 그리스를 통일하고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필리포스 2세가 진멸한 페르시아 제국의 재건을 위해 원정에 나선 것이지요. 젊은 알렉산더는 불과 2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소 아시아를 거쳐 페르시아 본토를 제압한 뒤,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 서북부까지 진격했습니다. 단 10년 만에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을 정복한 셈이었지요. 당대 최강이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이수스 전투(기원전 333년), 가우가멜라 전투(기원전 331년.. 2024. 5. 17.
로마 공화정의 위기와 그라쿠스 형제의 등장 1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대외 전쟁으로 인해 자영농이 몰락하고 유력자들의 대토지 소유가 급증하면서 로마 사회의 빈부 격차는 극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노예 유입으로 인한 자유민 실업 문제, 군인 징집제로 인한 농민층 피폐화 등 여러 모순이 첨예하게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정계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입니다.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 성향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장남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에 취임하여 대토지 재분배 법안인 '농지법'을 발의하게 됩니다.티베리우스가 제안한 농지법의 핵심은 국가에서 귀족들이 불법 점유한 토지를 1인당 500유게라(약 125헥타르)로 제한하고, 이를 초과.. 2024. 5. 17.
고대 그리스 양대 산맥,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대결 1고대 그리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국가, 스파르타와 아테네. 여러분은 영화 에서 악틱 전사들의 모습을 보고 스파르타의 강인함에 감탄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철학과 예술이 꽃피웠던 아테네의 모습에 동경심을 갖기도 했겠죠. 그런데 이 두 도시국가는 서로 너무나 달랐기에 종종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답니다. 급기야 기원전 431년, 양국의 대결구도는 그리스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인데요. 이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양국은 어떤 차이로 인해 충돌하게 된 걸까요? 두 도시국가의 숨겨진 전쟁 이야기를 들어보시죠!군사강국 스파르타 vs 문화강국 아테네먼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도시.. 2024. 5. 17.
기원전 5세기 아테네 democracy의 탄생과 페리클레스 시대의 문화혁명 1기원전 5세기는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 있어 민주정의 발전과 문화적 번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민주 정치 제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를 10개의 부족으로 재편하고, 부족별로 50명씩 총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인 불레를 설치했습니다. 불레는 매일 모여 도시국가 아테네의 정책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평의회 의장은 매일 추첨을 통해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주정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클레이스테네스는 도편 추방제를 도입하여 참주의 출현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도편 추방제는 매년 시민 총회에서 6,000표 이상을 얻은 인물을 10년 동.. 2024. 5. 17.
페니키아인들의 해상무역로와 문자 창제로 본 상업 및 문화 교류 1고대 지중해 연안에서 찬란하게 꽃피었던 페니키아 문명은 무엇보다도 뛰어난 항해술과 상업 활동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대담한 모험정신과 탁월한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넓은 바다를 정복해 나갔고, 광범위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교류의 중심지로 발돋움했습니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경까지를 전성기로 보는 페니키아 문명은 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국가 연맹체의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비블로스, 시돈, 티레 등이 주요 도시였는데, 일찍이 기원전 3000년경부터 해상 무역이 번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상업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줍니다. 특히 티레는 기원전 10세기 히람 왕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는데, 구약성서에도 솔.. 2024. 5. 17.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의 기원을 찾아서 1스포츠를 좋아하시나요? 여러분은 4년마다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올림픽 경기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 올림픽의 역사가 무려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실제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올림피아에서는 기원전 776년부터 고대 올림픽이 개최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제우스 신을 비롯한 올림포스 12신을 기리기 위해 4년마다 경기가 열렸다고 해요. 과연 올림픽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요? 지금부터 신화와 전설 속에 담긴 올림픽의 기원을 찾아 떠나볼까요?제우스를 기리기 위한 제전, 올림픽의 시작올림픽은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신, 제우스를 기리기 위한 제전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는 어릴 적 크레타 섬에 있는 아이다 동굴에서 자.. 2024. 5. 17.
바빌론 함무라비 법전에 나타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법체계 1기원전 18세기 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치했던 바빌로니아의 6대 왕 함무라비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방대한 분량의 법전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법전은 당시 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어, 고대 문명의 법체계와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01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자크 드 모르간에 의해 수사 지역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높이 2.25m, 지름 65cm의 거대한 화강암 석주(stele) 표면에는 아카드어로 쓰인 긴 글귀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는데, 법조문은 무려 282개 조항에 이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체계적이고 방대한 법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석주 상단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 2024. 5. 17.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 기술과 노예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상 1여러분은 고대 이집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웅장하고 신비로운 피라미드를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특히 기자의 대 피라미드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그 위용을 자랑하죠. 그런데 여러분은 피라미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5톤이 넘는 거대한 석재 블록들을 20년 넘게 쌓아 올려 높이 146m에 달하는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기원전 26세기경만 해도 현대의 굴삭기나 크레인 같은 장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어떻게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요? 또 그 과정은 .. 2024. 5. 17.
인더스문명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도시계획과 배수시설 1인더스문명의 도시계획과 배수시설인더스문명은 기원전 2600년경부터 기원전 1900년경까지 인도 아대륙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에서 번성했던 고대 문명입니다. 이 문명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문명 중 하나였으며, 특히 도시계획과 배수시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인더스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서는 이러한 도시계획과 배수시설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라파는 인더스문명의 최초 발견지로, 1921년 인도 고고학자 다야람 사히니(Dayaram Sahni)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하라파 유적에서는 격자 형태로 정교하게 구획된 도시 구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인더스문명 도시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도시는 대략 1평방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서남북 방향.. 2024. 5. 17.
메소포타미아의 시작과 수메르 문명의 태동 1메소포타미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땅'을 뜻합니다.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인류 문명의 요람으로 여겨지며,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습니다. 약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최초의 도시국가들을 건설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은 쐐기문자, 지구라트(경사진 계단식 공동 건물), 청동기 제련술 등을 발명했으며, 이는 이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우르 : 길가메시 서사시의 배경수메르 최대 도시국가 우르는 기원전 2600년경 제3우르왕조 때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이곳 출신의 영웅 길가메시에 대한 서사시는 세계 최고(最古)의 문학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서사시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 영생에 대한 열.. 2024. 5. 17.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수메르 도시국가들 1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세기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도시국가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가리킵니다. 이 지역은 농경과 목축이 발달할 수 있는 적절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어 인류 문명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500년경부터 우르, 우루크, 라가시, 키시 등의 도시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문명에 앞서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를 발명했고, 천문학, 수학, 건축 등의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습니다. 특히 지구라트(층계 피라미드식 신전) 건축물은 수메르 도시국가의 위용을 상징합니다. 유적 발굴 결과 우르 지구라트와 함께 수메르인들의 도시 계획, 배수 시설, 궁전.. 2024. 5. 17.
아우리그나치오 동굴 개요와 벽화의 발견 1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에 위치한 아우리그나치오 동굴(Cueva de Altamira)은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꼽힙니다. 1879년, 아마추어 고고학자 마르셀리노 산스 데 사우투올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 동굴은 선사시대 벽화의 걸작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1] 동굴 내부 천장과 벽면에는 다양한 색채의 동물 그림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초기에는 그림들의 진위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이후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결과 대략 기원전 14,000년에서 12,00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2]다양한 동물 그림들의 사실적 표현아우리그나치오 동굴벽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살았던 동물들의 모습을 실제와 같이 묘사했다는..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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