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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교양/역사

게르만 부족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한 프랑크 왕국

by 지식 발전소 2024.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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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유럽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할거하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 가운데 라인강 하류 지역을 근거지로 한 프랑크족이 5세기경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점차 갈리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다른 게르만 부족들을 제압하고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습니다.

 

특히 6세기 중반 즉위한 클로비스 1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의 지지를 얻어 프랑크 왕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 메로빙거 왕실은 내분과 기득권 다툼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대신 궁재(宮宰)라 불리는 실력자들이 국정을 좌우하게 되었지요.

 

8세기 초, 카롤루스 마르텔이라는 궁재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프랑크 왕국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베리아반도를 휩쓴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여 '유럽의 수호자'로 명성을 떨쳤고, 교황으로부터도 크게 환대받았습니다.

 

이어 카롤루스의 아들 피핀은 751년 교황 자키리아의 승인을 얻어 메로빙거 왕조를 폐위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768년에는 피핀의 아들이자 '유럽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서유럽 중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으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호자로 군림한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대제는 치세 초반부터 주변 이민족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우선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랑고바르드족을 격파하여 교황의 영토를 수호했고, 동쪽으로는 30여 년에 걸친 전쟁 끝에 작센족과 아바르족을 굴복시켰습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과 싸워 히스파니아 북부의 바르셀로나를 점령했고, 발트해와 대서양을 잇는 운하 건설을 추진하는 등 원대한 계획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은 이베리아 북동부에서 이탈리아 중부, 게르만 지역을 아우르는 광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지요.

 

카롤루스 대제는 정복 활동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호자로서도 존경받았습니다.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를 단호히 배격하고 정통 가톨릭 신앙을 관철시켰으며, 이교도였던 작센족에게는 군사적 압박과 함께 기독교 선교사를 파견하여 개종을 종용했습니다.

 

또한 교황 레오 3세가 로마 귀족들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해 교황을 구출하기도 했지요. 800년 크리스마스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곧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 제국의 적통임을 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고대 로마 문화의 계승과 문예부흥 주도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 내에서 고대 로마의 문화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선 라틴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관료제와 화폐 제도 등 로마식 통치 방식을 도입했으며, 옛 로마 영토 대부분을 복원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내세웠습니다.

 

또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궁정에 초빙하여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주도했는데, 영국 출신의 학자 알퀸(Alcuin)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알퀸은 투르 수도원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고전 문헌들을 수집, 정리하는 한편 카롤루스 대제의 자문역을 맡아 교육과 학문 진흥에 힘썼습니다.

 

특히 카롤루스 대제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写本 문화를 후원하여, 古代의 귀중한 문헌들이 필사되고 보존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필사본들은 독특한 문자 서체와 화려한 삽화로 유명한데, 오늘날 '카롤링거 미니어처'로 통칭되며 중세 사본 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라틴어 외에도 프랑크어의 문법서를 편찬하고 민간 설화 등을 수집하여 민족 문화 창달에도 힘썼습니다. 아울러 궁정에는 시인과 음유시인들을 불러들여 각종 연회와 의식을 빛내게 했는데, 후대의 기사도 문학이나 궁정 시가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집니다.

봉건제도의 확립과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마련

한편 프랑크 왕국의 광활한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카롤루스 대제는 ** 봉건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우선 제국을 여러 개의 지방(county)으로 나누고, 각 지방에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들 봉신(vassal)은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 군사적 봉사 의무를 지녔는데, 매년 5월 초여름이면 아헨 궁전에 조회하여 황제에 대한 충성을 새롭게 다짐해야 했습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렇게 형성된 봉건 질서를 토대로, 제후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죠.

 

또한 중앙에는 7명의 고위 관리로 구성된 추밀원을 설치하여 황제를 보좌하게 했고, 전국에 순회 재판관(missi dominici)을 보내 지방관의 감찰과 민정 감독에 나섰습니다. 이는 봉건제를 유지하면서도 국왕 중심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려 한 카롤루스 대제의 치국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화폐 제도의 정비입니다. 각 지역마다 제각각이던 화폐를 은화 중심으로 통일하고 순도 관리에 힘씀으로써, 상업 발달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도량형 제도의 표준화를 추진하여 원활한 물자 교류를 뒷받침하고자 했지요.

'유럽의 아버지'와 중세 봉건사회의 개막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서거하면서 프랑크 제국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제국은 **베르됭 조약(843년)**에 의해 동·중·서 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이는 곧 프랑스와 독일의 시원이 되는 사건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남긴 정치적·문화적 유산은 중세 유럽을 관통하는 규범이 되었습니다. 우선 그가 확립한 봉건제도는 중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로 자리 잡았고, 국왕과 제후 사이의 주종관계는 훗날 봉건적 신분질서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교황권을 강화한 것은, 중세 교회 중심의 질서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전 문화를 계승하고 학문과 예술을 진흥한 공로는, 훗날 중세 문예부흥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그의 위업을 기려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중세는 물론 근대 이후에도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세운 오토 1세를 비롯해 수많은 제왕들이 '제2의 카롤루스 대제'를 자처할 만큼, 그의 존재감은 유럽사에서 지대했던 것이죠.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새로운 카롤루스 대제'라 칭하며 그를 모델로 삼았고, 빅토르 위고와 같은 작가는 '샤를마뉴 전설'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카롤루스 대제를 기리는 동상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서 있고, 유로화 지폐에도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게르만 혈통의 프랑크 왕에서 기독교 세계의 황제로, 그리고 중세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기까지.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한 원대한 꿈의 결정체였습니다. 그가 남긴 정치·문화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유럽 정신의 뿌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한 고대 문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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