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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교양/역사

예수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탄생

by 지식 발전소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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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1세기 초 유대인 예수에 의해 창시된 새로운 종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지배되던 팔레스타인 지역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는, 자신이 구약성서에 예언된 메시아(구세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의 구원자라고 주장하며,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민중들에게 큰 희망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 유대교의 전통에 기반했지만, 그 해석과 중점사항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 용서, 평화를 강조했고, 부자와 권력자들이 아닌 가난한 자와 소외계층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또한 기존 유대교의 율법주의 제사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여, 영적 각성 내면의 신앙심을 강조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했고,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로마 지배층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주후 30년경 로마 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었습니다.

 

예수가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기쁜 소식)이라 부르며 적극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기독교 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로마제국 내 확산

예수가 돌아가신 후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이 기독교 신앙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공동체 생활 재산 공유를 실천했으며, 유대교의 전통 의식도 계속 지켰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방인 개종이 늘어나면서 유대교와의 결별이 불가피해졌고, 이는 사도 바울의 활약으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안디옥을 중심으로 이방인 교회를 세웠고, 수많은 전도 여행길에 올라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등지를 순회하며 기독교를 널리 알렸습니다.

 

1세기 후반이 되자 로마제국 전역에 기독교인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교회는 계급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천민과 노예, 빈민층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평등과 해방, 위로와 희망을 주는 새로운 정신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로마제국 내 기독교 박해

당초 로마 권력층은 기독교를 사이비 유대교 이단으로 여겼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고, 로마의 다신교 관행과도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은밀한 모임과 현세 부정적인 태도, 예수 재림 기대는 불길하고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를 가했습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에게 불을 지르고, 사자 밥으로 삼거나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황실 정원의 야간 축제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타르를 발라 촛대 삼아 불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2-3세기에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지속되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는 250년 기독교 박해 칙령을 내려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처벌받게 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는 기독교인 박해가 정점을 이뤘는데, 이때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독교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순교로 인한 열사 숭배와 기독교인들의 비폭력 저항 등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동경과 존경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밀라노 칙령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기독교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밀비우스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전투 전날 밤 꿈에 십자가와 "이 표지 아래 승리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전투 승리 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로마제국 내 공인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군대에 그리스 알파벳 'Χ'와 'Ρ' 문자를 기독교 표시로 새기게 했습니다.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는 점차 로마제국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동로마제국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국 전역에서 교회와 수도원 건립이 활발해졌습니다.

기독교의 국교화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성립

380년, 동서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공식 지정하면서 기독교는 온 제국에 걸쳐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교회가 하나의 중앙 집권적 조직으로 성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는 성직자 계급 교리를 정비하고, 엄격한 의식과 규율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성당 수도원 건립이 활발해지면서 교회의 영향력도 커져갔습니다. 교회는 구제 사업 교육, 문화 계승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교회 내 부패 성직자들의 탈선이 문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부와 권력이 교회에 집중되면서 일부 성직자들이 사치와 방종에 젖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후에 종교개혁 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혁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중세 유럽 문화에 미친 영향과 의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중세 유럽 전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교회는 유일한 구원자이자 가르침의 수호자로서 서유럽 사회 전반을 지배했고, 군주들조차 교황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지식과 교육의 근원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고대 문헌 사본 작업이 행해졌고, 대학과 학교도 교회 주도로 세워졌습니다. 또한 교회 미술과 건축은 고딕 양식이라는 중세 고유의 예술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한 고대 문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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