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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교양/역사

페니키아인들의 해상무역로와 문자 창제로 본 상업 및 문화 교류

by 지식 발전소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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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지중해 연안에서 찬란하게 꽃피었던 페니키아 문명은 무엇보다도 뛰어난 항해술과 상업 활동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대담한 모험정신과 탁월한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넓은 바다를 정복해 나갔고, 광범위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교류의 중심지로 발돋움했습니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경까지를 전성기로 보는 페니키아 문명은 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국가 연맹체의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비블로스, 시돈, 티레 등이 주요 도시였는데, 일찍이 기원전 3000년경부터 해상 무역이 번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상업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줍니다.

 

특히 티레는 기원전 10세기 히람 왕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는데, 구약성서에도 솔로몬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히람 왕에게 자금과 자재 지원을 요청한 일화가 나옵니다. 당시 페니키아의 부와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본래 레반트 해안 일대에서 목재와 노예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점차 무역 영역을 서쪽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기원전 9세기경에는 이미 키프로스섬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고, 기원전 8세기 중반 이후로는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사르데냐, 스페인 남부 등지로 세력을 뻗어나갔습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대표적인 식민도시로, 지중해 서부를 장악하는 해상 강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릅니다. 기원전 6세기경 페니키아 본토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당한 이후에도 카르타고는 여전히 独自적인 세력권을 유지했고, 로마와의 대결 구도 하에서 覇權을 다투었습니다.

 

이처럼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를 동서로 종단하는 해상 실크로드를 开拓했고, 당대 장거리 무역을 선도하는 상인 집단으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바다의 민족'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새로운 무역로 개척에 끊임없이 도전했으며, 향료, 보석, 유리, 염료, 포도주 등 각종 사치품을 유통시키며 막대한 富를 쌓아올렸습니다.

페니키아 무역 상품과 경제적 기반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다양한 상품을 거래했는데, 당시 최고의 사치품으로 꼽히던 자주색 염료가 대표적입니다. 티레 지역에서 채취한 특정 종류의 조개에서 추출한 염료는 현지에서 '티리안 퍼플'로 알려졌고, 전 지중해 세계에서 귀족들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만 입을 수 있었다는 자주색 가운을 비롯해, 군주와 성직자들의 의복에 티리안 퍼플이 쓰였던 사실은 이 염료의 가치와 위상을 잘 말해줍니다. 실제로 로마의 1년 예산에 맞먹는 액수였다는 플리니우스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그 희소성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또 다른 주요 교역품으로는 레바논 삼나무를 들 수 있습니다. 수직으로 곧게 자라는 레바논 삼나무는 배를 만드는 데 최적의 材木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궁전 건축이나 장례 의식에도 필수적인 자재였고, 앞서 언급한 솔로몬 성전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밖에 올리브, 포도주, 밀, 유리 제품, 금은 보석 등도 페니키아인들이 활발히 거래한 품목이었습니다. 그들은 원거리 무역에서 얻은 원자재를 가공하고 판매하는 데 능했는데, 특히 금속 세공과 유리 제조 기술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페니키아의 부는 지중해 해상 무역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변국들의 부족한 자원을 파고들어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이국적인 사치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식민 도시를 거점 삼아 광물 자원을 확보하고 노예 무역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자원 개발을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기술력과 정보력 또한 페니키아 무역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항해술은 물론이고 천문, 산술 등에 밝았던 이들은 새로운 항로와 시장을 꾸준히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민족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문화적 지식 역시 무역에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경제적인 면에서나 기술, 문화, 정보 등 다방면에서 우위를 차지했기에 그만큼 오랫동안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알파벳의 창제와 보급

페니키아 사람들이 역사에 남긴 업적 가운데 단연 빛나는 것은 알파벳의 탄생일 것입니다. '알파벳'이라는 말 자체가 페니키아 문자의 첫 두 글자인 '알렙'(알파)과 '베트'(베타)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것이 오늘날 전 세계 문자 체계의 기원이 되었음을 실감케 합니다.

 

물론 기원전 2천년기 무렵 이집트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가 널리 쓰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배우기도 쓰기도 너무 어려운 문자 체계였습니다. 반면 페니키아 문자는 22개의 자음 기호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고, 돌이나 진흙, 밀랍 등 어떤 재료에도 쓸 수 있어 활용도가 높았습니다.

 

이런 편리성 덕분에 페니키아 문자는 무역을 통해 지중해 연안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기원전 11세기경부터 키프로스, 그리스 등지에서 페니키아 문자를 토대로 독자적인 문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에트루리아와 로마 문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아랍 문자와 히브리 문자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동서양을 관통하는 표기 체계의 근간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만합니다.

 

알파벳 문자의 확산은 고대 사회의 문해율을 높이고 문자 문화를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복잡한 상형문자나 多音節 표기가 아닌 표음문자 체계가 널리 퍼지면서, 문자 사용이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서서히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인과 장인들은 물론 학문과 예술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표현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곧 페니키아의 상업 활동과 문화 전파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문자의 발명이 무역 기록이나 계약서 작성의 필요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유력한 만큼, 교역의 확장은 곧바로 문자 보급으로 이어졌을 터입니다. 더불어 식민지 건설 과정에서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도 문자가 핵심적인 매개 구실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다양한 문화의 전파와 융합

페니키아 문명은 해상 무역을 매개로 각기 다른 문화권을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넓게는 그리스, 이집트로부터 멀리 스페인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민족과 교류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창출하고 확산시켰던 것입니다. 교역 과정에서 이루어진 문물 교류, 종교와 언어의 전파는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종교적 측면에서 보자면, 페니키아 사람들은 다신교 신앙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바알, 아스타르테, 멜카르트 등을 섬겼는데, 농경신과 풍요신, 해양신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식민 도시 건설 과정에서는 이러한 신들의 제단을 세우고 현지 신앙과 융합시키는 방식으로 정착민들의 결속을 도모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티레의 수호신 멜카르트는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에 투영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고, 아프로디테 신화에도 페니키아의 여신 숭배 전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카르타고에서는 바알 하만과 타닛 여신이 주신으로 섬겨졌는데, 이는 로마에까지 전해져 토착 신앙과 결합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개방적이고 융화적인 종교관은 페니키아 문화가 주변 세계에 수용되는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술과 예술의 전파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이미 유명했지만, 유리 제조와 금속 공예, 건축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이들의 기술과 양식이 현지 문화와 조우하며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에트루리아에서 출토된 일부 유물에서 페니키아풍의 문양과 세공 기법이 발견되는가 하면, 스페인 남부의 건축물에서도 페니키아의 영향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카르타고에서는 페니키아 양식과 그리스 양식이 절묘하게 융합된 신전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장식 예술이나 조형물에서도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상호 교류의 흔적이라 할 만합니다.

 

언어의 보급은 앞서 언급한 문자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페니키아어는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오늘날의 히브리어나 아랍어와 유사한 면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이 언어는 자연스럽게 확산되었고, 각지의 언어들과 뒤섞이면서 새로운 변이형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북아프리카의 푸닉어는 페니키아어에서 직접 파생된 언어로, 로마 시대까지 카르타고 일대에서 통용되었습니다. 페니키아어의 어휘와 문법적 특성이 그리스어, 라틴어 등 인접 언어권에 스며들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리라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종합해 볼 때 페니키아 문명은 단순히 물자를 유통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와 문자, 사상, 종교, 예술 등 제반 문화 요소들을 전파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넓은 무역망을 바탕으로 형성된 국제적 교류는 서로 다른 전통과 양식을 접목시키며 문화적 혼종성을 낳았고, 이는 지중해 세계를 관통하는 보편 문명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를 잇는 교량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페니키아 문명은 글자 그대로 '지중해'(地中海, 땅 가운데 바다)의 심장부에서 동서 문명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등 고전 문명의 발상지인 지중해 연안 지역부터 유럽, 아프리카, 중동을 아우르는 광대한 무대에서 상업과 문화 교류의 핵심 고리로 작용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페니키아인들의 모험심과 진취성, 개방성이 발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영토와 자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향한 도전 정신으로 활로를 개척해 나간 이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异国 문물을 경계하거나 배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익히려는 유연한 자세 또한 주효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레 주변 문명과의 소통과 교감, 그리고 문화적 혼융으로 이어졌습니다. 곧 그들 스스로가 문화 전파의 매체요 촉매였던 셈이지요.

 

나아가 페니키아 문명은 오늘날 '세계화'라는 화두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무역을 통해 서로 멀리 떨어진 곳을 연결하고, 이질적인 문화 요소들이 활발하게 교차하는 양상은 현대 세계의 글로벌화와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현상을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상업 활동이 문화 전파와 융합을 촉진한다는 보편적 역학은 통시대적으로 관찰된다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니키아 문명은 '지구촌'의 원형이자 선구적 사례로 간주될 만합니다. 그들의 교역로가 단순한 상품의 이동을 넘어 인류 문명의 교감과 접목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수세기에 걸친 번영 끝에 카르타고가 로마에 의해 함락되면서 페니키아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전 지중해에 뿌려 놓은 문화의 씨앗은 훗날 찬란한 고전 문명의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 되었고, 멀리 현대 문명의 뿌리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언어와 문자라는 소통의 도구를 보급하고, 각기 다른 문명을 잇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더불어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한다는 교훈 또한 페니키아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개척정신과 진취성, 개방성과 유연성을 떠올리며, 다양성이 꽃피는 평화로운 지구촌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대 페니키아 문명이 인류 역사에 펼쳐 보인 고귀한 모습을 되새기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와 직결되는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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