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와 민족 운동의 태동
인도는 18세기 중엽 플라시 전투(1757년)에서 영국 동인도회사가 벵골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영국은 인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는데, 특히 19세기 중엽에는 여러 현지 왕국들을 병합하며 인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죠.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 통치하다가,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인도 통치 방식을 직접 통치로 전환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해체되고 인도 통치권은 영국 정부로 이관되었으며,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제국의 황제'를 칭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영령 인도 제국'이 수립되었고 인도는 명실상부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의 방식으로 인도를 지배했습니다. 종교, 계급, 언어, 인종 등의 차이를 이용하여 현지인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한 것입니다. 이슬람교도에게는 특혜를 주고 힌두교도에 대해서는 차별 정책을 펴는 등 종교 갈등을 부추겼고, 소수 엘리트 집단을 육성해 피지배층을 통제하고자 했죠.
또한 영국은 인도의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여 자국의 산업혁명을 뒷받침했습니다. 인도산 면화와 생사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기계제 면직물을 인도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죠. 수공업 제품의 자유로운 유통을 금지해 인도의 전통 수공업을 파괴했고, 토지세를 강화하여 인도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습니다. 이에 따라 인도 경제는 영국의 식민지 경제 구조에 편입되면서 종속과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19세기 후반 들어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민족 운동은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 엘리트층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영국식 의회 제도와 자치권 도입 등을 요구하며 온건한 개혁운동을 펼쳤습니다.
1885년 결성된 인도국민회의(INC)는 대표적인 개혁파 단체로서, 영국에 대한 충성을 바탕으로 점진적인 자치권 확대를 요구했죠. 이들은 영어 교육 확대, 경제 개발, 민주적 정치제도 도입 등을 주장했습니다. 인도국민회의는 매년 전국 대회를 개최하며 당시로서는 유일한 전인도적 정당으로 성장해갔지만, 여전히 친영적인 지주와 자본가 중심의 온건 개혁파에 머물렀습니다.
19세기 말에는 발간챠(Bal Gangadhar Tilak) 등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영국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즉각적인 자치와 독립을 요구했죠. 발간챠는 "스와라지(swaraj, 자치)" 운동을 전개하며 힌두 민족주의를 고취했고, 영국제 상품 불매와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개혁파와 급진파 모두 소수 엘리트 중심의 운동이었고, 대중적 기반은 취약했습니다. 게다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 종교적 균열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죠. 이런 가운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 위해 전후 자치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탄압을 강화했죠. 1919년에는 세디션법(Rowlatt Act)이라는 악법을 제정하여 인도인들의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또 전쟁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인도인들에게 가혹한 징병과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인도 민중들은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학살을 자행했는데, 1919년 4월 펀자브 주의 암리차르에서 벌어진 일이 대표적입니다. 영국군은 수천 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모인 잘리안왈라 바그 공원을 포위하고 무차별 발포를 가해 수백 명을 학살하고 1,500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를 냈습니다.
이 암리차르 대학살 사건은 영국 식민 지배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인도 전역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로써 영국에 대한 협력과 개혁의 기대감은 완전히 무너졌고, 독립을 위한 대중적 저항 운동이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간디와 네루를 중심으로 한 무저항 불복종 운동이 전개되면서, 인도 민족 해방 투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간디의 등장과 불복종 운동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하다 귀국한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민족해방운동에 합류하면서 이 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 굳건함/비폭력 저항)"의 원칙에 입각한 대중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시민 불복종과 비폭력 저항으로 영국의 통치에 맞서는 방식이었죠.
간디는 1919년 세디션법 반대 운동을 필두로, 1920년대에는 영국산 상품 불매운동과 비협조 운동(Non-cooperation movement)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영국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영국이 운영하는 학교와 법정, 관공서 등을 보이콧하고, 토산품 사용과 전통 방직을 장려했죠. 간디가 직접 물레를 돌리며 khadi(카디, 손으로 짠 천)를 입는 모습은 민족 해방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30년에는 유명한 소금 행진(Dandi March)으로 영국의 소금세(Salt Tax) 부과에 저항했는데, 간디가 직접 소금을 만들어 판매하는 등 시민 불복종 운동의 정점을 찍었죠. 이러한 간디의 운동에는 농민과 노동자, 여성, 지식인 등 인도 사회 전반이 대거 참여했고, 영국의 통치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간디는 종교 간 화합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힌두교도이면서도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를 올리는 등 종교적 관용을 실천했고, 범종파주의(sarva dharma sama bhava,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를 표방했죠. 힌두-이슬람 간 단결을 민족운동의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인도국민회의 내부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 불신과 반목이 계속되었습니다. 회의 지도부의 다수파였던 힌두교도들은 이슬람계의 정치적 발언권 확대를 꺼렸고, 이들 사이의 종교적 대립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또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죠.
한편 192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계급 모순에 주목하는 민족운동 세력이 부상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 수바스 찬드라 보스 등 좌파 인사들은 독립 후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노동자·농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했죠. 이들은 간디류의 비폭력주의와 별개로 노동조합과 좌익 정당 조직화에 힘썼습니다.
이처럼 인도국민회의 내에서는 종파적, 이념적으로 상이한 세력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영국 식민통치에 대항한다는 궁극적 목표 하에 일정한 연대와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죠. 그러나 독립이 가시화되면서 회의 내부의 종교적, 이념적 분열은 더욱 표면화되었고, 이는 이후 비극적인 분할 독립으로 이어집니다.
이슬람 민족주의의 발흥과 파키스탄 건국론
인도 민족해방운동 내에서 이슬람계의 목소리도 점차 커져갔습니다. 힌두교도 중심의 회의 지도부에 실망한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이슬람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된 것이죠. 1906년에는 영국의 이슬람계 우대 정책에 힘입어 무슬림연맹(Muslim League)이 결성되었습니다.
초기 무슬림연맹은 영국에 우호적이었고 힌두교도 세력과 대립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족운동에 동참하면서 반영 투쟁 노선을 걷게 되었죠. 그럼에도 무슬림연맹은 인도국민회의 내 힌두교도들의 종교적 편향성을 문제 삼으며, 이슬람교도의 권익 보호를 우선시했습니다.
1930년대 들어 무슬림연맹의 지도자로 떠오른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이슬람교도의 독자적 국가 건설을 공식 천명했습니다. 진나는 1930년대 후반 무슬림 대중을 상대로 한 정치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두 민족론(Two Nation Theory)'을 제창했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별개의 민족이므로 별도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1940년 무슬림연맹 대회에서는 이슬람교도 다수 지역에 자치국 건설을 요구하는 라호르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이 파키스탄(Pakistan) 건국론의 출발점이 되었죠. 파키스탄은 펀자브(P), 아프가니스탄(A), 카슈미르(K), 신드(S)와 발루치스탄(TAN)의 합성어로 '순수한 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후 진나는 "파키스탄을 쟁취하지 않고는 물러서지 않겠다"며 이슬람 국가 건설에 매진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영국은 크립스 사절단을 파견해 인도에 전후 독립을 약속했지만 즉각적인 자치권 이양 요구는 거부했습니다. 이에 인도국민회의는 "영국은 물러가라"(Quit India)는 구호를 내걸고 대규모 저항 운동에 돌입했죠. 간디와 네루 등 회의 지도부는 이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또다시 투옥되었습니다.
한편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은 힌두교도들의 지배를 우려해 독립 쟁취보다는 파키스탄 건설에 방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2차 대전 말기 인도의 민족해방운동은 파키스탄 건국을 둘러싼 종교 세력 간 분열 양상으로 전개되었죠.
전후 영국은 더 이상 인도를 통치할 여력이 없음을 절감하고 독립을 서두르게 됩니다. 1946년 영국 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의 분할 독립안을 제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마운트배튼 경을 신임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죠. 마운트배튼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대립이 격화하자 조속한 분할 독립을 추진했습니다.
결국 진나의 파키스탄 건국론이 관철되어 1947년 8월 14일,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이 먼저 독립했고, 이튿날인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국경선 획정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빚어졌고, 특히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뒤섞여 살던 펀자브와 벵골 지역의 분할을 둘러싸고 유혈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분할 독립의 후유증과 종교폭동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 독립은 대규모 인구 이동과 종교 폭동, 난민 발생 등 큰 혼란을 수반했습니다. 무슬림 다수 지역인 서펀자브와 동벵골이 각각 파키스탄 영토로 편입되면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한 것이죠. 힌두교도들은 인도로,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 대거 이주했는데, 그 규모가 무려 1,4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힌두-이슬람 간 유혈 사태가 속출했습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難民 행렬을 상대로 한 약탈과 폭행, 집단 학살이 빈발했죠. 펀자브에서만 50만 명 이상, 벵골에서도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여성들은 강간과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약 7만 5천 명의 여성이 납치되거나 성폭행 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는 難民들의 이주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했고, 폭도들의 만행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언론들이 상호 비방을 주고받으며 종교적 적대감을 부추기기도 했죠. 독립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회의 주류파였던 힌두교도 세력은 이슬람교도들을 배제하고 인도 지배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슬람교도들도 파키스탄으로의 이주를 서둘렀습니다.
더욱이 양국 간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분쟁도 폭력 사태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특히 잠무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벌어졌는데, 이는 이후 인도-파키스탄 간 3차례의 전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카슈미르는 무슬림이 다수였지만 힌두교도 군주가 통치하던 지역이었는데, 당시 군주가 인도 합병을 선언하자 파키스탄이 이를 반대하며 무력 충돌이 빚어졌던 것이죠.
분할 독립 과정에서 회의 지도자들도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의 독립국가 건설 주장을 일축하고 인도의 통합을 역설하던 간디는 결국 힌두 민족주의 세력의 반발을 사 1948년 1월 30일 힌두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간디는 "신이시여, 인도에 평화를!"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한편 파키스탄을 이끈 진나는 분할 독립 직후인 1948년 9월 폐렴과 결핵으로 사망했고,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된 네루는 국토 분단의 트라우마 속에서 인도 건설에 매진해야 했습니다. 또 간디의 암살 이후 회의 지도부에서는 이념 갈등이 격화되면서 사회주의 세력과 우파 민족주의 세력 간 노선 대립이 첨예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양국 내 종교적 소수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파키스탄으로 넘어간 힌두교도들, 인도에 남은 무슬림들은 이등 시민으로 전락했고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수 종교 신자들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죠. 독립을 전후해 양국에서 발생한 종교 폭동으로 사망한 이들이 무려 2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분할 독립의 한계와 남겨진 과제
인도의 분할 독립은 오랜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점을 남겼습니다.
우선 영토 분할로 인한 지정학적 불안정입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분쟁 지역 중 하나로 꼽힙니다. 양국은 줄곧 군사적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고, 특히 핵무기 개발 이후에는 세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경을 접한 카슈미르 지역에서의 영토 분쟁과 테러 문제로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분할로 인한 경제적 혼란과 발전 기회 상실도 뼈아픈 대목입니다. 인도 아대륙은 오랜 역사를 통해 단일한 경제권을 이루며 많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왔는데, 독립과 함께 단일 시장이 붕괴되고 산업 기반과 인프라가 둘로 나뉘었죠. 한 예로 세계 최대의 면화 재배지이자 방적 공업 중심지였던 펀자브가 둘로 쪼개지면서 남아시아 섬유 산업이 타격을 입었습니다. 분할로 단절된 도로와 운하, 관개 시설 등으로 농업 생산성 역시 큰 폭으로 떨어졌습니다.
또 힌두-이슬람 종교 갈등이 격화한 것도 분할 독립이 남긴 뼈아픈 유산입니다.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난민을 낳은 참혹한 종교 폭동의 후유증은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도의 경우 여전히 다수파인 힌두교도와 소수파 무슬림 간 불신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고, 양 종교 극단주의 세력 간 충돌도 빈번합니다. 파키스탄 역시 강경 이슬람 세력의 발호로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념적 노선 갈등의 심화도 문제였습니다. 독립 직후 인도국민회의 내에서는 사회주의 세력과 우파 민족주의 세력 간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습니다. 초대 총리 네루가 사회주의 경제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한 민족주의 세력이 회의를 탈당해 자나타당(민족자원봉사단)을 결성하는 등 계파 간 알력이 극심했죠. 그 결과 통합적 국가건설에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발전이 지체되는 부작용이 초래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패권적 국가체제로의 회귀 문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났음에도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모두 소수 종족과 하층민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계속되었죠.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가 온존했고, 소수 종족과 피압박 계급의 인권이 유린되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속에서 지방의 자치권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죠. 파키스탄 역시 펀자브 지역 엘리트 중심의 국가운영으로 벵골 등 여타 지역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은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지니며, 20세기 탈식민 민족해방운동의 서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가 매우 큽니다. 특히 간디로 상징되는 인도의 비폭력 민족해방투쟁은 마틴 루서 킹을 비롯한 후대의 인권운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은 여전히 갈등을 안고 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며 국제 사회에서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소수자 인권을 증진하는 한편, 경제 발전과 빈곤 퇴치에 힘쓰고 있죠. 다만 종교적 관용과 평화적 공존의 모색, 양국 간 교류와 협력의 확대 등은 여전히 남겨진 숙제라 하겠습니다.
인도 분할 독립의 역사는 국가 형성과 민족 정체성 확립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그 과정에서 종교와 이념, 계급의 문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또한 탈식민이 자동으로 자유와 평등, 번영을 보장하지 않으며, 피지배 민족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도 분할 독립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과 성찰거리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한 고대 문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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