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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교양/역사

쿠바 미사일 위기와 소련·쿠바 대 미국 간 대치

by 지식 발전소 2024.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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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과 미국의 견제

1959년 1월 1일, 쿠바 혁명 세력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며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완전히 축출했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 무력 혁명의 승리를 선포하고 새 정부 수립을 천명했습니다.

카스트로 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과감한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습니다. 미국 기업과 부유층의 토지와 자산을 몰수하고 근본적인 사회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쿠바 정권을 적극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10월, 미국은 쿠바와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이어 1961년 1월에는 미주기구를 통해 쿠바를 격리시키는 경제 제재와 무역 금수 조치를 가했습니다.

1961년 4월에는 더 나아가 중앙정보부가 주도하는 '피그스베이 침공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쿠바 망명자 1,400여 명으로 구성된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여 쿠바 만 인근 해안가에 상륙시키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침공 작전은 쿠바군에 의해 3일 만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의 쿠바 지원과 미사일 기지 건설

카스트로 정부와 미국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쿠바를 지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62년 2월 소련은 쿠바와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핵미사일 기지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소련의 이 같은 전략적 포석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습니다. 첫째, 구소련은 쿠바 혁명을 사회주의 진영 확대의 호기로 삼고자 했습니다. 둘째, 베를린 위기 이후 약화된 소련의 서베를린 지위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 본토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억제하고 전략적 지렛대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쿠바 전역에 약 4만 2천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전략 미사일 기지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소련은 중거리 미사일 42기와 지대지 미사일 24기 등 핵무기를 반입했습니다. 이 사일들이 완전 배치되면 미국 동부 해안까지 타격 가능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의 위기 인식과 대응

1962년 10월 16일, 미 정찰기 U-2가 쿠바에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진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이 정찰 사진은 워싱턴에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60일 이내 소련의 핵미사일 공격 능력이 완성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미 행정부는 10월 18일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대응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전면전 혹은 공격 외에도 해상 봉쇄, 외교 압박 등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었습니다.

결국 케네디 대통령은 10월 22일 전국 연설을 통해 '전략적 대응 방안'을 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응 방안의 골자는 △쿠바 해상 봉쇄 △소련 미사일 기지 즉각 철수 △유엔 사찰단 파견 등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미국은 최고 수준의 군사 대비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소련과 쿠바의 반발 및 위기 고조

미국의 강경 대응에 소련과 쿠바 역시 격렬하게 반발하며 사태는 급격히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후르시초프와 카스트로는 미국의 행위를 노골적인 전쟁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따라 양측은 최대 규모의 군사력을 소집해 쿠바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군 합동전략사령부는 전략폭격기, 항공모함, 수송기 등 1,800여 대의 전력 자산을 배치했습니다. 소련 측도 전략 폭격기 40여 대를 쿠바에 출격시켰고, 잠수함도 배치했습니다.

양측은 상대방의 조그만 기습에도 전쟁이 촉발될 수 있는 초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유사 이래 인류 역사상 최악이자 최대 규모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던 것입니다.

사흘간의 무장 대치와 극적 타결

10월 24일부터 사흘 간 쿠바 해역에서는 극한 무력 대치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는 밤낮으로 외교 실무진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좀처럼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위기는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10월 27일에는 미 함정이 소련 잠수함을 납치하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만약 소련 잠수함에서 핵무기 발사가 이뤄졌다면 제3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양측은 타협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후르시초프가 화해 제의 서한을 보내오면서 긴장은 조금씩 풀렸습니다. 11월 20일, 유엔 주재 소련 대사와 미 대사 간 비밀회담 끝에 최종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핵심 합의 내용은 △소련의 쿠바 핵미사일 기지 철수 △미국의 터키 주둔 핵미사일 철수 △양국 상호 공격 중지 약속 등이었습니다. 소련은 즉시 쿠바 미사일 기지 철거에 착수했고, 미국도 대소 봉쇄 완화에 나섰습니다.

양측 입장과 영향

쿠바 미사일 위기는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최대 규모의 핵전쟁 위험 사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평화로운 해결을 이뤄내며 핵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사태 해결 후 미국과 소련은 상호 간에 공식적으로 사과와 합의 사항 준수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서로를 향해 반목과 불신도 키웠습니다.

미국은 카스트로의 쿠바가 계속해서 사회주의 진영에 남아 대주권 완충지대가 된 데 대해 우려했습니다. 이에 따라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와 무역 금수 조치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소련의 경우, 핵전쟁을 모면했다는 점에서는 안도했지만, 서방의 압박에 굴복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커다란 체면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후유증으로 작용하며 소련 사회 내부에 혼란과 분열이 가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소 양국 간에는 핵 군비 통제와 상호 평화공존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핫라인' 직통전화 설치, 모스크바 조약 등 일련의 군축 협정도 이 위기 사태 이후 추진되었습니다. 이는 냉전의 완화와 극적인 종식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인류에게 핵전쟁의 위험성을 잔인하게 각인시켰지만, 동시에 상호 군축과 평화적 대화를 통한 갈등 해결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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