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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초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그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 체제가 형성되면서, 미국은 자유진영의 수호자로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었다.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했는데, 이는 "전 세계 자유민들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소수에 의한 무력 지배 시도를 억제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개시했고, 서유럽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 재건을 위해 대규모 지원을 실시하는 마셜 플랜(1948-1952)을 가동했다.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과 6월 서베를린을 둘러싼 소련의 봉쇄 조치는 미국으로 하여금 대(對)소련 강경책을 더욱 가속화하게 만들었다.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창설된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였다. 한편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인해 미국의 핵 독점이 깨지고, 10월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함에 따라 아시아에서도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념 대결의 전선이 제3세계로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처럼 1950년대 초 전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이자, 미국은 소련 및 국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공세적인 봉쇄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외교·군사·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대응이었는데,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군사 분야에서는 NATO 강화를 비롯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동맹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1951년 9월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이 일본과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을 맺어 아시아 전략의 거점을 마련했다. 1954년 9월에는 동남아시아 집단방위체제인 동남아조약기구(SEATO)가 창설되었고, 이듬해에는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의 대만 방위 공약도 천명되었다.
경제 분야에서 미국은 자국 주도의 자유무역 질서를 확립·유지하고자 했다.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통해 다자간 무역자유화의 제도적 기반을 닦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마셜 플랜에 이어 1949년부터는 저개발국 원조 계획인 포인트 포 프로그램(Point Four Program)도 가동했다. 물론 이는 원조 대상국들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치·외교적 의도와 결부된 것이기도 했다.
문화·이념 측면에서도 미국의 대공산권 봉쇄 드라이브는 한층 노골화되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 출범 직후 국무장관에 취임한 덜레스는 "공산주의를 밀어내고, 압박하고, 후퇴시켜야 한다(roll back)"는 입장을 강력히 천명했다. 1953년에는 국제정보처(USIA)가 신설되어 서방 가치 전파와 공산 이념 비판에 주력했고, 1956년에는 대외원조 창구로 국제개발처(ICA)가 발족했다.
이렇듯 다각도로 추진된 미국의 봉쇄 전략은 1950년대 줄곧 이어졌고, 제3세계를 냉전의 주요 각축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는 1957년 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천명한 이른바 아이젠하워 독트린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중동 지역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존재감이 한층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내용과 배경
1956년은 국제정세에서 중대한 격변이 잇따랐던 해였다.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제1서기의 스탈린 비판이 제기되어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파문이 일었고, 이는 동유럽 일부 국가들에서 정치적 동요로 이어졌다. 6월 폴란드 포즈난 항쟁과 10월 헝가리 사태가 대표적이었다.
또한 7월에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중동에서 새로운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반발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10월 군사행동에 나섰으나, 미국과 소련의 반대로 12월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보인 무력함은 제국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지위가 이미 크게 훼손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중동에서의 세력 공백이 소련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고 공세적 대응에 나섰다. 1957년 1월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이른바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발표했는데,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동의 어느 나라든 국제 공산주의로부터 공공연한 무장 침략의 위협을 받을 경우, 그 나라가 원조를 요청하면 미국은 군사력 사용을 포함한 지원을 제공할 것이며, 이를 위한 특별기금으로 2억 달러를 책정한다. … 중동의 안정과 평화 유지는 세계 평화와 미국의 국익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중동에서 힘의 공백이 러시아의 팽창을 초래한다면 자유세계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기본 발상은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미국이 중동에서 보다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경제 원조를 매개로 역내 우방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반공 방파제로서 이들을 적극 활용한다는 구상이었던 셈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행정부는 의회에 중동 특별기금으로 2억 달러를 요구했고, 의회도 이를 가결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배경에는 수에즈 위기 과정에서 노정된 영국과 프랑스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 세기 말엽 이후 중동 질서를 주도해온 두 구(舊) 제국주의 열강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에 별다른 대응 수단을 갖지 못한 것은 이들의 쇠락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당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대(對)중동 접근이 강화되는 조짐을 보인 점도 미국으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실제 1955년 9월 이집트와 체코슬로바키아(소련) 간 대규모 무기거래 계약이 체결되었고, 소련은 아스완 하이 댐 건설 지원 의사도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공산권이 중동의 불안정과 힘의 공백을 틈타 세력을 확장한다면 자유 진영 전체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미국의 기본 인식이었다.
더욱이 당시 '제3세계'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이른바 비동맹 노선의 원형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여기서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 대표들은 식민주의 청산, 평화 공존과 중립 외교, 상호 내정 불간섭 등의 원칙을 천명했다. 이는 냉전의 양대 진영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이처럼 신생 독립국을 중심으로 한 제3세계의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비중을 더해가자, 미국으로서는 이들을 자유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그 일환으로 미국은 NATO 참여국을 주축으로 한 「바그다드 조약」(1955.2) 체결을 지원했다. 중동의 북단에 반공 방파제를 구축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이를 제국주의 세력의 신(新)식민통치 음모로 맹비난하면서 역내 결속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수에즈 위기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노정되면서, 이들에 의존한 역내 안보 구도의 한계 또한 명백해졌다.
이에 미국은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통해 중동에서의 자국 영향력 확대와 반공 질서 구축에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미국 대외전략의 기조로 자리 잡았고, 특히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이념적 대응으로서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전개 양상과 주요 사례
아이젠하워 독트린이 발표된 직후인 1957년 4월, 요르단에서는 반미·친소 노선의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 제6함대가 신속히 지중해로 급파되었다. 이는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신속한 발동을 보여준 사례였다.
또한 1957년 중반 레바논에서 대(對)정부 시위가 발생하고 정국이 극도로 불안해지자, 샤문 대통령은 미국에 해병대 급파를 요청했다. 이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의회 승인도 없이 미 해병 1만 4천여 명을 레바논에 상륙시켰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일방적 군사개입이 낳은 부작용도 적지 않았지만, 레바논의 친서방 정권을 유지하는 데는 일정 부분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아이젠하워 독트린에 입각해 미국은 중동 역내 집단안보 체제 구축에도 적극 나섰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그다드 조약을 대신해 1959년 출범한 중동조약기구(CENTO)였다. 이는 중동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역내 국가들과 미국·영국이 안보협력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창설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혁명(1958.7) 이후 이라크가 바그다드 조약에서 탈퇴하는 등 역내 정세 혼란으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대중동 군사·경제 원조는 1960년대 초까지 계속 확대되었다. 그러나 역내 민족주의 운동의 발흥, 역내 분쟁 등으로 인해 역내 정세는 차츰 불안정해졌고,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도 한계가 노정되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이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크게 영토를 확장했는데, 이에 반발한 아랍 국가들은 이른바 '석유 무기'를 앞세워 맞섰다. 이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과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처럼 중동의 역학관계가 복잡 미묘해지면서 아이젠하워 독트린 자체의 한계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1970년대까지 미국의 대중동 정책기조로 작용했으며, 역내 현상변경 시도에 제동을 거는 명분으로 종종 원용되곤 했다. 1990년대 초 소련 해체로 인한 탈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미국은 중동 및 걸프에서 영향력 유지에 주력했는데, 이는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의 대두와 미국의 대응
1950-60년대는 제2차 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이 세계사의 전면에 본격 등장한 시기였다. 이들은 정치적 자결과 경제적 자립을 요구하며 제국주의 잔재 청산에 나섰고, 중립 외교와 비동맹 운동으로 냉전 대결구도에서 벗어나려 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급진적 사회개혁을 시도하며 소련 등 공산권과의 제휴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처럼 제3세계의 민족해방 운동에 내재한 혁명성에 주목하며 공산화 위험을 우려했다. 이에 제3세계 각국의 내부사정과 맥락을 세밀히 고려하기보다는, 반공 대 친공의 이분법적 잣대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미국은 민족주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포섭하기보다는 억압·배제하려 들었고, 이는 현지에서 반미감정을 확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53년 이란 모사데크 정권에 대한 쿠데타 지원, 1954년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 전복 사건 등이었다. 당시 이들 정권은 미국계 기업에 대한 국유화 조치 등을 단행했는데, 이는 자국 자원에 대한 주권 행사 차원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을 공산주의화로 가는 시발점으로 간주했고, 중앙정보국(CIA) 등을 통해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 결과 친미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 발표 이듬해인 1958년 레바논 사태 때 미국이 해병대를 급파해 시위대를 진압한 것도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미국의 시각과 대응방식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레바논에서는 범아랍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 정서가 크게 고조되어 있었는데, 미국은 이를 공산 세력의 배후 조종으로 간주하고 군사개입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대응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1965년 4월 도미니카공화국 내전에 대한 미군 개입이었다. 내전 와중에 좌파 성향의 국민혁명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미국은 이를 '제2의 쿠바'로 규정하고 해병 2만여 명을 투입해 사태를 진압했다. 이는 1823년 먼로 독트린 이래 미 대외정책의 핵심 기조였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일방적 군사간섭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의 확전과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변용
인도차이나반도에서도 1960년대 이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의 군사개입이 전개되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군의 북베트남 폭격이 개시되었고, 1965년 2월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지원 부대인 베트콩의 공세가 거세지자 미국은 지상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해 연말 주월미군 병력은 18만 명으로 늘어났다.
미국이 이처럼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발을 들여놓은 데에는 베트남 민족해방 운동을 공산화의 신호탄으로 본 인식이 깔려있었다. 당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남베트남 인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업고 미군에 맞서 선전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를 중국과 소련 공산 세력의 사주를 받은 위장전술로 간주했다.
그러나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 개입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졌다. 존슨 행정부는 1968년 들어서야 북베트남과의 평화회담에 나섰지만, 국내 반전여론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닉슨 행정부는 1969년 7월부터 주월미군 병력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이른바 '베트남화(Vietnamization)'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군사개입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1970년 4월 베트콩의 근거지로 의심되는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대대적으로 폭격했고, 닉슨 행정부 말기인 1972년 12월에는 하노이와 하이퐁 등 북베트남 주요 도시들에 대한 '크리스마스 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미군 철수에 앞서 북베트남에 결정적 일격을 가함으로써 전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였다.
1973년 1월 파리 평화협정 조인으로 미군은 모두 철수했지만, 이듬해 북베트남군의 총공세로 남베트남 정권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인도차이나반도는 모두 공산화되었고, 미국으로서는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떠안은 채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미군 사상자만 5만8천여 명에 달했고, 전쟁 수행에 투입된 비용은 1,500억 달러가 넘었다.
닉슨 독트린으로의 선회와 그 함의
베트남전 악몽을 겪으며 아이젠하워 독트린도 재검토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69년 7월 닉슨 대통령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전략 구상을 발표했는데,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었다. 그 핵심은 아시아 국가들의 자체 방위능력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되, 미국은 핵우산 제공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① 조약상 공약이 있거나 미국의 핵심이익이 걸린 지역 외에는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 자국 방위를 책임진다, ② 미국은 동맹국들과 우방국들의 독자적 방위노력을 지원한다, ③ 타국에 대한 핵 위협이 있을 경우 미국은 확실한 보복을 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과도한 대외개입과 그에 따른 부담을 줄이면서도, 지역 차원의 안보 공약은 견지한다는 새로운 접근법이었다.
닉슨 독트린은 이후 카터 행정부의 '중핵국가(key-nations)' 정책, 레이건 행정부의 '돌격대(spearhead) 전략'으로 계승되었다. 핵심은 공산 팽창 저지라는 기존의 목표를 견지하되, 동맹 및 우방국들이 '중핵'이 되어 지역 차원의 안보역할을 분담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 파키스탄, 남아공 등을 반공 돌격대로 육성했다.
이처럼 냉전 후기 미국은 직접 개입보다는 우방국을 통한 간접적 영향력 확보에 주력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을 공산화와 직결 짓는 시각과 대응기조 자체는 지속되었다. 1979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혁명 정권 수립, 1980년 짐바브웨 민족해방운동에 의한 다수 지배정권 출범 등을 둘러싸고 미국은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 및 시사점
아이젠하워 독트린은 직접적으로는 1950년대 후반 중동 정세에 대응한 것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을 공산화 위협과 연계해 인식한 결과물이었다. 중동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차이나반도 등에서도 미국은 이 독트린에 입각해 현지 정세에 적극 개입했고, 그 결과는 반미감정 확산과 역내 불안정 심화로 이어졌다.
베트남전 악몽을 겪으며 아이젠하워 독트린은 수정을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것이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인식 자체의 전환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대중앙아메리카 정책 등에서 보듯 반공 기조는 냉전 종식 때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아이젠하워 독트린의핵심적 한계는 제3세계 각국의 정치·경제적 요구와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은 채, 이념 대결의 잣대로만 접근했다는 데 있었다. 이는 미국의 이익이 걸려있는 곳이라면 무력 개입도 서슴지 않겠다는 일방주의적 자세의 발로였다. 이런 강압적 정책은 제3세계에서 반미감정을 증폭시켰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장기적 이익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도 여전히 패권 경쟁과 이념 대립이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한층 복잡 다기해졌다. 단순히 이념의 잣대로 지역 정세를 재단하려 해서는 곤란하다. 각국의 정치 현실, 경제적 이해관계, 국민들의 정서 등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위에서 국제규범에 기초한 협력과 존중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일방주의를 경계하고,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평화와 번영의 지속가능한 세계질서는 대화와 설득, 파트너십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이 남긴 소중한 교훈이라 할 수 있겠다.
한 고대 문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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